
VIXTOR NIKIFOR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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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I KATSUKI
St. Valentines Day.
『 죄인, 발렌티노는 들어라! 그대는 거룩하신 황제 명령을 거부하고 감히 전쟁 중 결혼을 비밀리에 성사시켜 주었다. 그 죄는 대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과도 다르지 않으며 신에 대한 반역과도 다르지 않다! 그 죄를 중히 따져 오늘, 아프릴리스 14일 그대를 처형에 하노라! 마지막으로 신께 구걸할 말이 있느냐?
-…부디 신께서 사랑에 눈이 먼 자들을 용서해 주시고 축복을 내려주소서… 』
*
벽돌로 만들어진 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게 지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로의 살결은 만진다던가 숨을 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던가 서로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창밖 밤하늘에는 아직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보름달이 떠 있었다. 유리는 그런 달을 쳐다보면서 눈물을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께선 언제 전쟁을 시작하신다고 했나요.”
유리는 이미 그 질문에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물어보는 이유는 그가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 진격하신다고 하셨어.”
그는 상냥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만을 내뱉었고 그 말을 들은 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빅토르는 유리의 얼굴을 외면하며 내일이면 보름달이 뜰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그가 떠난다는 뜻이었다. 유리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몇 번이나 그를 위해 울어주었지만 지금 우는 목소리는 아이처럼 서러웠다. 그런 유리를 위해 그는 어떤 위로도 해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그가 떠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미 쉬어버린 목으로 우는 유리를 세게 안아주며 미안하다고 속삭일 수밖에 없었다. 전장으로 향하는 사람은 빅토르뿐 유리는 아직 나이가 다 차지 않아 군인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목을 옥죄었다. 며칠 전부터 안 가면 안 되냐고 부탁도 해보고 화를 내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로마 제국의 전사로서 그럴 수 없다는 대답만 주었다. 또한 탈영한 전사들의 취급이 어떤지 유리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는 것이 또 떠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들은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둘이 갖는 생각은 엇갈렸다. 유리는 그가 살아서 돌아오길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지만, 빅토르는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그가 잘 견뎌내길 바랐다. 유리가 자신 때문에 죽는 모습을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유리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흐느끼더니 작게 빅토르를 불렀다. 다정하게 답해오는 낮은 목소리를 기억해두려 했다. 유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빅토르, 우리 지금 결혼하면 안 돼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되지도 않을 말을 했다. 유리는 최근에 와서 눈치챘다. 빅토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의 목숨이 아닌 자신의 삶이란 것을. 그와 늘 참전에 대해 다툼을 하면 빅토르는 유리의 전후 삶에 대해 걱정할 뿐 그의 생사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유리는 이런 상태로 그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빅토르는 그 말을 듣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부드럽게 달랬다.
“오늘 내일 결혼을 성사시켜줄 신부님은 없을 거야.. 게다가 약속도 했었잖아.”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기로.”라고 말하며 유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거절을 당해 분하다기보단, 빅토르의 태도가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빅토르가 다정히 유리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자 빅토르는 고민했다. 이런 상황을 가장 바라지 않았던 그였다. 적어도 전날 밤은 웃으면서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빅토르는 그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눈 밑은 붉어져 있었고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그는 잠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생각하며 가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유리, 내 소망은 네가 행복해지는 거야. 이건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늘 말했던 거니까. 내 목숨 따위 너에 대한 모든 것보다 아래에 있어. 이게 내 마음이야. 그래서 만일 전쟁이 나서 내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는 뒤에 더 할 말이 있었지만, 유리가 또다시 울 것 같아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미 너무 많이 운 뒤라 눈물은 나오지 않고 어깨만 작게 떨렸다. 그는 다시 말을 이으려 했지만 유리가 먼저 말해 잠시 입을 닫았다.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밉다고 하면요..”
유리는 그렇게 말하고 빅토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빅토르는 “심술부리지 말아줘…”라고 속삭이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너와 평생 함께 사랑을 속삭이고 싶어. 하지만 네게 기다림을 강요하고 싶진 않아. 이번 전쟁이 길어질지 짧을지는 아무도 몰라. 그리고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려. 네가 헛된 희망을 품은 채 혹시 죽었을지 모르는 날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빅토르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으나 이렇게 냉정하게 관계를 정리하는 듯이 말하는 그의 말이 날카롭게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유리도 결국은 지쳐버렸다. 빅토르의 모든 것을 포기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바뀔 것 같지 않았다. 유리는 그를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가 전쟁에서 살고자 하길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어떻게 하면 그가 변할지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빅토르. 그럼 전쟁이 2주가 지나면 그때 결혼해 줄래요? 보통은 2주가 지나면 승패가 보인다면서요…군법에는 어긋나지만 발렌티노 신부님은 몰래 결혼을 시켜 주신다고 들었어요. 전 빅토르 없인 살 생각 없어요. 당신도 마찬가지면서 왜 이렇게 굴어요…”
유리는 말하면서 마지막 말을 흐리고 말았다. 그쳤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 났기 때문이다. 유리의 제안은 군법에 심히 위배되는 말이었다. 전쟁 중 이 마을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고 발각된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 제안에 그렇다고 답하면 유리는 빅토르를 전장으로 보내줄 것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유리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유리의 눈물 섞인 끈질긴 부탁을 거절하기엔 빅토르는 유리를 끔찍이 사랑하고 있었다.
며칠 전, 전쟁 계획이 발표된 뒤 빅토르는 혼자서 유리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역시 다른 사람에게 유리를 떠나보내긴 싫었지만 이기적인 생각만은 할 수 없다고 여겼다. 황제가 준비하는 전쟁은 꽤나 큰 규모였다. 아마 살아돌아오긴 글렀다며 모든 병사들이 조국에 죽음을 바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옳은 일과 자신의 욕심 속에서 전자를 택했던 그였지만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은 욕심을 택하라며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잘 견뎌왔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에 와서 뒤바뀌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유리를 끌어안으며 낙심한 채 말했다. 목소리엔 절망이 베어 있었다.
“알았어. 2주가 지나면 널 만나러 올게. 네가 말한 신부님께 가자. 그래도 만일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땐 내가 말한 대로 해줘야 해…”
빅토르의 말을 들은 유리는 더욱 눈물을 흘렸다. 빅토르도 그의 작은 품에 기대어 울었다. 그들은 서로를 품에 안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달은 점차 지평선에 누우면서 어둠을 끝낼 준비를 했다.
다음 날 아침엔 그전까지와는 다르게 그들 사이엔 전보다 편안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빅토르는 옷을 둘러 입으며 군대로 갈 준비를 했다. 떠나기 전까지 그들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유리는 빅토르를 마중 나가려 했지만 그는 눈에 띄면 안 될 거라고 말하며 유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유리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눈은 지쳐 보였다.. 그 사실을 눈치챈 빅토르가 유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신께서 당신을 지켜주시기를.”
그렇게 빅토르는 떠났고 그날 밤 유리는 잠에 들 수 없었다.
*
그가 없는 첫째 날엔 발렌티노 신부님에게 찾아갔다. 신전에서 신부님은 바빠 보이셨지만 유리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유리가 우물쭈물하면서 있자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유리는 조심스럽게 결혼을 부탁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좋습니다. 사랑은 신께서도 거룩히 여기는 것들 중 하나이지요. 날짜와 상대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앞으로 14일 이후 정도 밤에 하고 싶습니다…상대는 '빅토르 니키포르프'고 지금은 전장에서 있습니다”
신부님은 그 말을 듣자 잠시 아무 말하지 않고 서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날 밤이 오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유리가 죄책감이 깃든 표정으로 서있자 신부님은 눈치채고 유리를 불렀다. 유리는 깜짝 놀라며 신부님을 바라보았다.
“사랑은 신성한 것입니다. 전혀 죄스럽게 여길 이유가 없지요. 비록 우리들의 행동은 황제의 명령에는 따르지 않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사랑을 포기하기엔 그대들은 너무 젊지 않습니까?”
그 말에 유리는 안심되는 듯이 표정을 지으며 감사하다고 답했다. 신부님은 유리의 어깨를 토닥였고 이제 가봐도 좋다고 했다.
“신께서 그대들을 보살펴주시기를…”
신부님은 그렇게 기도하고 빙그레 웃었다. 유리는 참 좋은 신부님이라고 생각했다.
*
유리는 그를 기다리는 2주 동안 점차 말라갔다. 하루가 지날수록 빅토르가 없다는 고통은 그를 점차 잠식해갔고 음식은 입에 잘 대지 않았으며 침대에서 꼼짝 않고 빅토르를 기다렸다. 주위 사람들이 걱정하고 그를 챙겨주기도 했지만 빅토르 없인 무엇도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열흘 째 밤이 지났을 즘 로마 군이 승세라는 소문이 들렸다. 비록 소문일지라도 유리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분이 좋아져 잠시 밖에 산책이라도 가려 했지만 오랫동안 걷지 않아서 긴 산책은 힘들었다.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걷는 중에 그들의 사이를 알고 있던 젊은 부인과 우연히 마주쳤다. 서로 안부 인사를 건넸고 부인은 그를 보며 안쓰럽게 말했다.
“그 잠시 동안 많이 말랐네. 빅토르가 돌아와서 널 본다면 전혀 기뻐하지 않을 것 같은데… 뭐라도 챙겨 먹는 게 좋지 않겠니.”
그렇게 말하면서 그에게 방금 산 음식들을 건네주었다. 유리는 고맙다며 웃었고 부인은 가끔은 자신의 집에 와서 밥을 챙겨 먹으라고 하고, 유리를 바라보다가 전쟁이 승세이니 금방 끝날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유리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빅토르를 위해서라도 많이 먹자며 부인이 준 음식들을 꺼내 보았지만 제대로 끼니도 못 챙겨 먹으면서 전투에 임할 빅토르가 떠올라 쉽사리 먹지 못했다. 그러다 호수에 가서 얼굴을 씻으려 했을 때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눈가와 볼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광대는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죽기 직전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빅토르가 돌아와서 본다면 적잖이 놀랄 것 같아 그제야 뭐라도 먹자고 생각했다. 나흘 동안 다시 살이 붙을 수 있을까라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엔 즐거움이라곤 전혀 없었다. 유리는 다시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럴수록 나중에 고통만이 기다리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유리는 죽을 정도로 빅토르가 그리웠다. 따스한 그의 품 안에 안겨 쉬고 싶었다. 호숫가에서 잠시 앉아있다가 일어나서 천천히 삭막한 집을 향해 걸어갔다.
*
약속한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그동안 꽤 열심히 먹은 것 같았지만 다시 호숫가에 가서 제 모습을 보았을 땐 며칠 전과 다를 게 없었다. 그나마 당장 내일 죽을 것 같은 얼굴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나흘 만에 사람이 달라질 리는 없지만 유리는 주위 사람들이 챙겨준 음식을 전보단 열심히 먹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선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그날 밤은 달이 손톱만 한 날이었다. 너무 얇아 끊어질 것 같았지만 이내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고 하늘엔 별들만이 가득했다. 유리는 이 밤하늘을 그도 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 상태로 벽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마침내 해가 밝았을 때 유리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이 깼다. 밖으로 나가서 무슨 일 인가 살펴보니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웅성웅성 떠들고 있었다. 그 내용은 로마군이 승세가 확실하여 황제께서 정복 지역을 좀 더 늘릴 것이라 전쟁이 길어진다는 내용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황제께서 명한 말이니 다들 무어라 말하진 못했다. 유리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은 채 다시 집에서 그를 기다렸다. 이 시간이 얼마나 길어질까 슬퍼하며 스스로를 감싸 안았다. 해가 하늘 꼭대기에 걸려있었고 배에선 흉측한 소리가 났다. 아침에 음식을 챙겨 먹는 것을 놓쳐서 지금이라도 먹자고 생각해 부인이 챙겨준 음식을 꺼내 먹었다. 빅토르가 집으로 올지 몰라서 집에선 한 발자국도 안 나갔지만 해는 뉘엿뉘엿 주홍빛을 뽐내며 지평선 끝자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는 얇은 희망의 끈을 붙잡은 채 기다렸다. 시간은 점차 흘러 어느새 주변이 깜깜해졌다. 유리는 조용히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였다. 그러다 졸음이 쏟아졌지만 빅토르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억지로 버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졸음은 더욱 거세게 몰려왔고 며칠 동안 밤을 새운 그는 더 이상 졸음을 이길 수 없어 결국 눈이 감겼다.
누군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손은 유리가 매우 그리워했던 것과 같은 느낌이라 가만히 손길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유리는 잠이 덜 깬 상태로 몸을 뒤척였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그를 톡톡 건드리는 느낌에 한 번 더 뒤척였다.
“유리, 일어나 봐.”
그 목소리에 유리는 잠에 깼다. 그가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는 자신 앞에 있는 남자를 보기 위해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그를 더듬었다.
“많이 말랐네. 그동안 제대로 안 챙겨 먹었구나.”
어둠에 눈이 조금씩 익숙해 지자 제대로 그를 바라보았다. 밝은 은발을 가진 사랑하는 연인이 제 앞에서 푸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유리는 눈물이 나려 했지만 울음소리로 이 상황을 망치기 싫어 억지로 눈물을 머금었다. 그를 끌어안으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빅토르는 그런 유리를 토닥이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빅토르의 몸에 상처는 없는지 살펴보았다. 자잘한 상처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큰 부상은 없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서로 한참을 끌어안고 있다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가 신부님께 가자고 말했다. 빅토르는 끄덕이며 집을 나섰다. 걸어가는 동안 유리는 다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가다가 털썩 주저앉고 말았고 빅토르는 유리를 팔로 들어서 안았다. 빅토르가 힘들까 봐 걱정했지만 조금 더 그와 붙어있을 수 있어 기쁘다고 여겼다. 빅토르에게 가는 방향을 말하고 신부님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렇게 걸어가면서 빅토르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별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라 금방 대화가 끊겼다. 그들은 결혼한다는 사실에 괜스레 긴장해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신부님이 묵는 집에 거의 다 도착했다. 꽤나 늦은 시간이었지만 문을 두드리자 신부님은 나와서 그들을 맞이하여 주셨다. 유리가 이미 사정을 설명한 터라 그들은 바로 신전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은 받을 수 없었고 무척 초라했지만 그들은 이렇게라도 서로와 영원을 약속할 수 있어 기쁠 뿐이었다. 신부님은 준비한 옷들을 꺼내 주시며 갈아입는 게 어떠냐고 하셨고 그들은 옷을 받아 갈아입었다. 유리는 흰 천을 두르고 허리엔 모직으로 된 띠를 둘렀다. 신부님은 매듭에 푸른색으로 색깔을 칠해 주었다. 대충 준비가 된 것 같자 신부님은 작은 케이크를 가져와 그들 앞에 놓고 낡은 파피루스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대들이 이곳에 온 것은 혼인하려는 뜻을 신께 엄숙히 고백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부님은 여러 형식적인 말들을 읽고 앞으로 물어보는 질문에 서로 답하라고 했다. 그들은 여러 배우자에 대한 맹세들에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고 서로의 손을 더 꼭 잡았다. 발렌티노 신부님을 그들을 보고 빙그레 웃으시더니 서로 신께 고백하라고 작게 말씀하셨다. 빅토르는 내 양손을 잡고 들어 올려 말했다.
“당신을 평생의 동반자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웃어 보였다. 유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당신을 평생의 연인으로 맞아들여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신부님은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밝혔다. 그분은 앞에 놓여 있는 작은 케이크를 그들에게 자르게 한 뒤 유리의 머리 위에서 부스러트렸다. 그리고 부서진 빵조각을 주워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원래는 이 조각들을 하객들에게 나누어 주지만, 지금은 하객들이 없으니 내가 간직하도록 하지요.”
그 말을 듣고 빅토르는 작게 웃었다. 유리는 “어찌나 초라한 결혼식인지.”라고 말했다. 그 말속에는 악의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케이크를 나누어 먹고 옷을 챙겨 갈 채비를 했다. 떠나기 전 신부님께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말하고 신부님은 축복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빅토르는 유리를 들어서 안고 신전에서 나왔다. 신부님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신전을 정리하러 다시 들어갔다.
빅토르 품에 안겨 길을 따라가면서 유리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흑빛 하늘엔 별들이 흩뿌려져 있었고 눈앞에서 흔들리는 그의 은발은 대비를 이루었다. 그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이런저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가 없는 2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뭘 했는지, 대부분은 시답잖은 얘기였다. 그리고 유리는 졸음이 조금씩 몰려와서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고 뒷말을 흐렸지만 빅토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반응을 했다. 유리가 입은 스톨라는 땅바닥에 길게 끌렸다. 어느덧 집에 도착했고 유리는 아직도 그와 결혼한 사실이 믿기지 않은지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빅토르는 조심히 그를 눕히고 그의 허리에 묶여있는 매듭에 손을 댔다. 매듭을 풀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유리는 긴장해 온몸이 굳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유리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유리는 이런 그의 모습이 정말 그리웠지만 내일 아침이 오면 그가 떠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빅토르, 꼭 다시 돌아와 준다고 약속해요. 날 두고 가지 말아요…”
눈물이 베여있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유리가 가지 말라는 의미는 내일 아침 떠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도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맹세할게. 전쟁이 끝나면 가장 먼저 네게 찾아올게…”
그는 더 말할 것처럼 입을 달싹이더니 뜸을 들이고선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혹시…내가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넌 혼자가 아니야 영혼은 늘 함께일 테고 신 옆에서 널 보살펴 줄게.”
빅토르는 결국 유리에게 헛된 희망을 품게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전보다 유리는 훨씬 나아 보였다.. 비록 몸은 말랐지만 적어도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유리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기뻐서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유리는 그의 품에 안겨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했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 둘은 몸을 섞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둘의 영혼은 마치 이어져 있는 것같이 느껴졌고 그 무엇도 그들의 미래를 더럽힐 수 없었다. 신의 가호 아래 그들은 영원히 하나일 것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
Epilogue
그와 같이 밤을 보낸 뒤 눈을 떴을 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입었던 혼례복은 내 머리맡에 잘 개어져 있었다. 대신 입고 온 옷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시 전장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혼례복 위에는 작은 네 잎 클로버가 놓여 있었다. 언제 이런 걸 찾았는지 피식 웃음이 났다. 아침으로 부인이 챙겨준 수프를 먹은 후에 혼례복을 들고 신부님께 찾아갔다. 신부님은 어제처럼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고 마침 옷이 필요하던 참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무슨 뜻이냐고 묻자 또 새로운 연인들 결혼을 성사시켜 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며칠 전에 신부님을 찾아갔을 때도 바빠 보이셨는데 얼마나 도와주시는 건지 감이 안 왔다.
“황제께선 아직 모르시죠?”
신부님은 그렇다고 답했다. 내가 걱정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신부님은 안심시켜 주려는 듯이 활짝 웃으시면서 말했다.
“황제 명령을 거역하는 전 신의 사도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에 눈먼 어린 연인들은 참으로 가련하지요. 부디 신께서 이 아이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보살펴 주시기를 매일 밤 기도합니다. 신은 사랑을 중요히 말씀하시니 용서하여 주실 겁니다.”
신부님은 참으로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 모두 신부님을 존경한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나는 도울 일이 없냐고 물었고 그럼 케이크를 굽는 것을 도와달라고 말씀하셨다.
며칠 동안 전쟁 소식만을 기다리며 날을 보냈다. 그가 준 네 잎 클로버를 잘 말려 늘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했다. 이렇게 하면 마치 그가 옆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떠나고 며칠 동안 다시 지옥 같은 날이 반복되었지만, 그날들도 흘러가다 보니 어느새 한 달이 지나있었다. 사람들은 로마 군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많이 없지만 나쁜 소식은 들리지 않는 다며 안심했다. 나도 그 당시에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심장을 졸이며 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좋은 소식들만 들려와 빨리 전쟁이 끝나길 바랐다.
*
8개월에 걸친 원정은 로마제국의 승리였다. 다들 다행이라며 신께 감사하다고 입을 모아 기도했다. 길었던 전쟁이 끝나고 전사들이 마을로 돌아왔다. 상당수가 살아남은 것 같았고 부상이 심한 사람들도 많이 없었으나 다들 표정을 지친 표정들이었다. 나는 그중 빅토르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눈을 돌렸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고 승리의 환호성에 내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군사장이 곧 있으면 전쟁 결과를 선언한다며 다들 광장으로 달려갔지만 난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빅토르가 준 네 잎 클로버를 바라보면서 그를 떠올리자 눈물이 왈칵 났다. 전쟁이 끝나면 가장 먼저 날 찾아와 준다고 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불길한 생각만을 떠올리게 했다. 불안감이 엄습하고 한기가 들었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입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제발 무사하기를 신께 기도드리며 울고 있을 때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다들 광장에 간 터라 이쪽으로 올 일은 많이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 보았다. 멀리서 전사 한 명이 팔에 난 상처를 붙잡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그때 마치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는 것 같았다. 전사는 나를 보더니 지친 기색을 감추고 활짝 웃었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는 나를 따스하게 맞아 주었다. 상처가 덜한 한쪽 팔로 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금, 늦었네 미안해.”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복귀 행진에서 몰래 빠져나오느라 조금 늦었다고 답했지만 그 말에 답해 줄 정신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혹시 다른 상처는 없는지 살펴보았다. 한 쪽 팔에만 심한 부상을 입은 것 같고 나머지는 자잘한 상처들이었다. 못 본새 흉터가 많이 늘었다. 그래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맞추며 이제 들어가자고 말했다. 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벅찬 마음을 억누르며 그에게 말했다.
“응, 어서 와요. 빅토르.”
*
몇 개월 뒤 군이 마을로 복귀하고 발렌티노 신부님의 죄가 발각이 되었다고 했다. 그와 나는 부디 아무 일이 없길 바랐지만 황제는 엄벌할 것이라고 하시니 희망이 없었다. 나는 처형식을 보러 갈 순 없어 신께 신부님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신부님께 결혼을 부탁한 사람들은 마을에 매우 많았다. 모두 황제께서 명령을 철회하여 주시기를 기대했지만 로마의 법은 냉정했다. 결국 신부님은 세상을 떠나셨고 우리들은 신부님을 위해 장례를 치렀다. 신부님을 보살펴주시길 바라며 기도드리고 시체의 입속에 동전들을 넣었다. 장의사들에게 부탁해 뒤 순서를 부탁하고 마을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내가 또 눈물을 흘리려 하자 그가 안아주었다.
매년 우리는 신부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기념했고 월계수 잎과 꽃을 꺾어 신부님 무덤 위에 놓았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척 소중했던 분이었는데 이렇게 떠나신 사실이 사람들을 슬프게 했다. 빅토르는 우리가 신부님을 잊지 않고 매일 기도드리면 신께서도 황제께서도 나중엔 용서해 주실 거라 말했다. 나는 그러길 바라며 무덤에서 발걸음을 옮겨 우리의 새로운 집으로 향했다.
fin
+해석
해석을 보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안 보셔도 됩니다!
설정 상 빅토르는 20살 유리는 16살 입니다. 당시 로마는 17살 부터 군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나이를 설정했지만 빅토르가 졸지에 범죄자가 됐네요..빅토르가 떠나기 전날 밤 뜬 꽉 차지 않은 보름달은 빅토르와 유리의 불완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서로 갈등하고 싸우지만, 결국은 타협을 보죠. 그리고 떠나는 밤 뜨는 보름달은 둘의 타협된 상태를 의미해요. 전쟁 중 발렌티노 신부님은 몰래 많은 결혼을 성사시켰습니다. 유리가 찾아갔을 때도 결혼식 준비 중이었죠. 유리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는 젊은 부인은 유라치카의 엄마라는 설정이 있었지만 그것까지 풀기엔 시간이 없었습니다.ㅠㅠ 이것도 나중에 풀게 되면 좋겠네요. 유리는 유라치카를 잘 돌봐주었죠! 이 얘기도 외전으로 쓰고 싶습니다ㅠ 둘의 결혼식을 삭망일로 잡은 까닭은 그들의 결혼이 철저히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달조차 그들의 결혼식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죠. 결혼 중간에 유리 머리위에 빵가루를 뿌려주는 행위는 신부에게 하는 절차입니다. 발렌티노 신부님도 유리가 예쁜 걸 아셨나봅니다. 특별한 언급이 없었지만 유리에게 신부가 입는 스톨라를 건네주었죠. 그리고 빅토르가 유리를 집에 들어서 안고 가는 행위는 서양 결혼 전통인 신랑은 첫날밤에 신혼집 문지방을 밟게 하지 않는 것과 동일합니다. 비록 신혼집을 구하지 못해 유리의 집에서 했지만..유리 허리에 묶여있는 매듭은 신랑인 빅토르만 풀 수 있습니다. 순결을 넘긴다는 의미가 있죠..// 꾸금도 풀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빅토르는 다음날 바로 군으로 복귀하고 오는 길에 주운 클로버를 남기고 가죠. 혹시 자신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 클로버가 유리의 행운을 끌어와 주길 바라면서 두고갑니다. 더 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중요한 것만 쓰고 나머지는 따로 정리하겠습니다! 제 해석방식 말고도 독자님들의 방식으로 해석하시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재미없는 설정 이야기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기
안녕하세요! YUJA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고 싶네요// 발렌타인 합작에 참여하고 글을 쓰게 되어서 행복했어요! 읽으시면서 이게 발렌타인 합작 맞나 고민하신 분도 있을 수 있어요ㅜㅜ마지막까진 분위기가 우중충했죠.
제가 주제로 잡은 건 발렌타인 데이에 대한 설화예요. 글에 등장하는 발렌티노 신부는 실존 인물로 추정됩니다. 발렌타인 데이 설화를 보시면 고대 로마는 전쟁중 결혼을 금지시켰죠.(탈영의 이유나, 복잡한 문제들..) 그러나 발렌티노 신부는 전쟁 중임에도 몰래 결혼을 성사시켜 주었고 나중에 들켜 2월 14일에 죽게 됩니다. 그 이후 그를 추모하며 그 날을 기념했고 오늘 날에 발렌타인 데이가 된 거라고 많이 알려져 있죠. 그 얘기를 쓰고 싶었어요! 로마는 남색을 권장하기도 했고, 풀기 좋은 배경이라고 생각했었죠..고증 문제 때문에 이것저것 찾아보느라 시간을 좀 썼네요ㅠ 이 글에 뒷 이야기, 전쟁 후 마을 상황, 빅토르가 전쟁당시 팔을 다친 이유, 유리가 8개월 동안 있었던 일 같은 걸 천천히 쓰려고 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나중에 제 포스타입을 찾아와 주세요♥ 글을 쓰는 동안 힘들긴 했지만 막상 다 써놓고 읽어보니 뿌듯하네요. 다른 분들 합작도 이보다 더 좋을 거라 확신합니다. 다시 한번 더 합작을 주최해 주신 Aimer님께 감사드리고, 참여해 주신 분들,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