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IXTOR NIKIFOR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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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I KATSUKI
눈꽃, 별 그리고
“유리, 내일 뭐해? 4대륙 참가하러 출국하나?”
“다음 주에 가기로 했어, 왜? 밀라.”
토요일 저녁 즈음, 훈련을 마친 일본의 특별 강화 선수, 카츠키 유리가 짐을 챙겨 훈련장을 빠져나가려 할 즈음, 그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황급히 뛰어온 밀라가 그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그랑프리 파이널이 끝나고 러시아에 와서 훈련한 지도 벌써 두 달. 처음엔 빅토르와 또 다른 유리를 빼곤 한없이 낯설었던 이들이었지만, 이젠 모두와 아침 인사 정도는 자유롭게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밀라는 그 두 명 다음으로 유리에게 친숙한 선수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녀의 물음에 그는 최대한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답해 보였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표현하는 고마움의 의미이기도 했다. 밀라는 유리의 대답이 기대한 그대로였는지, 들뜬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내일 나랑 같이 만들래?”
“… 뭐를?”
“그건 비밀! 시간이랑 장소는 따로 보낼게, 내일 봐!”
용건을 일방적으로 마친 밀라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무리로 달려 가버렸다. 묘하게 남아버린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던 유리는 어쩔 수 없다는 의미의 가벼운 한숨을 쉰 후,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곳에 처음 도착하고 일주일 정도는, 함께 사는 빅토르나 길을 알고 있는 유리가 아니면 훈련장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연스럽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근처의 식당이라던가, 카페 정도는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없을 정도로. 처음으로 유리가 스스로 커피를 사 왔을 때, 모두가 그를 칭찬하던 반면, 사실 빅토르만은 내심 씁쓸한 표정을 지었더랬다. 그것은 단순히 받아 든 커피의 맛이 썼다기보다는, 자신의 손을 하나둘씩 놓아가는 그에 대한 아쉬움이었으리라. 유리는 그때의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또 그 카페에 들려 커피를 사 가기로 결심했다. 한층 기특해진 자신과 그런 자신을 여전히 아껴주는 그를 위해서. 이방인을 낯설어하던 카페 주인도 이젠 그를 보며 손을 흔들어 인사해 보일 정도로 친밀해져 있었다. 그리고 버벅대던 주문은 어느새 메뉴판을 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해있었다. 가게를 나선 유리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은 캐리어에 들고, 또 다른 한 잔은 두 손으로 꼭 쥐며 생각했더랬다.
나의 이러한 변화를 과연 당신은 나만큼 좋아해 줄는지.
―
늦은 밤, 밀라에게서 온 시간과 장소가 명시된 문자를 받은 유리는 대체 어떤 걸 만들기에 자신을 부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훈련의 피로로 인해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거부할 타이밍을 놓친 유리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다른 방에서 곤히 자는 빅토르가 깨어나지 않게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는 데 성공했다. 중간에 방에서 튀어나온 맥커친 때문에 한차례 위기가 있긴 했지만, 겨우 달래서 진정시켰더랬다. 하지만 성공했다는 기쁨도 잠시, 길가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유리는 생전 처음 보는 주소에 결국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유리는 빈 도로를 유유히 운전하고 있는 택시 한 대를 겨우 발견해 탈 수 있었다. 잘 정리된 내부와 이 진한 섬유 향수의 냄새는, 자신이 첫 손님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빅토르 없이 택시를 이용하는 것은 처음이긴 했지만, 유리는 그때의 기억을 드문드문 되살려 조금 익힌 러시아어와 영어를 적절히 섞어 무사히 목표장소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유리는 다행히 출발했다는 자신의 문자를 보고, 미리 나와 기다려주고 있던 밀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제저녁, 자기 직전에 문자를 보내놓고 오지 않는 답장에 은근히 걱정하고 있던 그녀는, 유리를 발견하자마자 웃음꽃을 피우며 달려와 끌어안으며 말했다.
“정말 와줬네! 사실 반신반의했는데!”
“… 그럼 돌아가도 될까?”
“아, 아니지! 이제 안 돼!”
밀라는 당장에라도 떠나려는 유리를 잡고 집안으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집은 집인데 주택이라기보다는 기숙사 같은 느낌에 더 가까워 보였다. 실제로 안으로 들어가니 방이 여러 개인 것이, 유리는 그제야 이곳이 여자 선수들을 위한 숙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뒤늦게 오면 안 되는 곳에 와버린 거 아닐까 하는 위기감을 느꼈지만, 자신의 팔목을 부여잡은 밀라의 악력에 자신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지자 그저 침묵했다. 결국,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반쯤 포기해버린 유리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주방이었다. 보통 주방보다 커다란 것이 아무래도 여러 선수가 함께 생활하는 곳이니만큼 그런 것이 아닐까, 그는 나름대로 생각했다. 밀라가 놓은 유리의 손목에는 그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뚜렷한 자국이 남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엔 가녀려 보였는데, 아무래도 일전에 들었던 리프트 사건은 사실이었나 싶었다. 호랑이 같은 성질의 유리를 들어 올렸다는 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유리가 체온으로 자국을 지우기 위해 팔목을 문지르고 있을 동안, 밀라는 미리 준비해놓은 물품들을 늘여놓고 그를 향해 짜잔! 하고 펼쳐 보였다. 순간, 유리는 자신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을 의심했다.
“… 과자? 초콜릿?”
“얼마 후면 밸런타인데이니까! 유리는 마침 그날 러시아에 없으니까, 미리 줄 겸!”
유리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밀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문이 점점 가까워질 즈음, 밀라는 재빨리 문을 잠그고, 자신의 팔을 이용해 그 문을 막아 보였다. 유리는 어느새 그사이에 갇혀있었다. 이게 언젠가 한창 유행했던 카베동(벽치기)인가. 유리는 그 시절에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것을 지금, 그것도 여자인 밀라에게 당하고 있었다. 두근거리긴커녕 자신보다 작은 키인데도 나오는 압박감이란 무서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밀라의 박력에 이기지 못한 유리가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굽힘으로써, 오히려 그의 키가 더 작아진 구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결국, 남자의 자존심이라던가, 위엄이라든가, 그런 종류들은 다 던져버려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파악한 유리는 두 손으로 안경 아래의 얼굴을 가려가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밀라는 그제야 팔 안에 가둬놨던 유리를 풀어주며, 그녀 나름대로 최대한 상냥하다 생각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초콜릿 중탕 부탁해! 하는 방법은 옆에 있는 책에서 참고하고!”
유리는 밀라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그녀의 말대로 책이 놓여 있었는데, 제목부터 ‘연인을 위한 초콜릿을 만드는 법’이었다. 유리는 마치 젖은 걸레를 만지는 듯한 손짓으로 책을 들어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별, 달 등 기본적인 모양부터 곰, 고양이 같이 고난도일 것 같은 동물 모양을 만드는 방법들이 실려 있었다. 유리가 중탕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책을 계속해서 넘겨보고 있자, 밀라는 그 모습이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책을 뺏어선 가장 앞부분을 펼쳐 유리에게 넘겼다. 기본 TIP이라고 적혀있는 부분에 친절히 초콜릿 중탕하는 방법이 적혀있었다. 순간 창피해진 유리는 알고 있으면 진작 알려주든가, 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애써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해 보였다. 방법을 터득한 유리는 인덕션 위에 물을 가득 채운 냄비를 올리곤, 끓어오르는 것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널린 재료들과 도구들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던 유리는 그 안에 파묻혀 있던 모양 틀을 발견했다. 그것을 바라보기 시작한 유리의 눈은 어느새 흥미로 가득 차 있었다. 밀라는 그 모습이 뿌듯했는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눈꽃 모양, 예쁘지?”
“그렇긴 한데, 굳어서 빼낼 때 어렵지 않을까? 깨질지도 모르고.”
“뭐, 우리한테 그것만큼 어울리는 모양도 없으니까. 아, 물 끓는다.”
유리는 밀라의 말에 황급히 세기를 줄이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초콜릿을 담아둔 볼을 끓는 물에 조심스레 올려서 초콜릿을 녹이기 시작했다. 책으로 볼 때는 넣기만 하면 바로 녹을 것 같았는데, 좀처럼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답답해하던 유리는 담가두었던 볼을 잠깐 꺼내곤 다시 책을 펼쳐 읽어보았다. 사진 밑에 작은 글씨로 버터를 넣으면 더 빨리 녹는다는 글귀가 보였다. 유리는 옆에서 재료와 도구를 정리하고 있는 밀라에게 버터의 소재를 물었고, 마침 재료를 정리하고 있어 손에 버터를 쥐고 있던 그녀는 그것을 유리에게 바로 건네주었다. 유리가 버터를 작게 잘라 한두 덩이를 넣고 다시 중탕을 시작하니, 아까보다는 더 잘 녹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유리는 다 중탕 된 초콜릿을 밀라와 함께 틀에 붓기 시작했다. 눈꽃, 별, 하트 등 다양한 모양으로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장식이 가능해질 정도로 굳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유리가 이렇게 많이 만들어서 누굴 주려고 하는 거냐고 그녀에게 묻자, 밀라는 글쎄, 라고 말하며 생각을 시작하더니, 손가락을 하나, 둘씩 접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함께 훈련하는 선수들은 다 줄 기세였다. 그녀의 반응에 유리는 그럼 나는 결국 내가 만든 초콜릿을 밀라에게서 받게 되는 걸까, 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포기했다. 4대륙을 앞두고 몸이 굳어질 정도로 가득 찼던 긴장이 그녀의 제안 덕분에 조금씩 풀리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굳어진 초콜릿을 틀에서 꺼내고, 데코 펜으로 꾸미기 시작한 밀라는 가만히 서 있는 유리에게 제안했다.
“빅토르한테 줄 것 정도는 따로 만들어보는 게 어때?”
“… 에, 에?!”
“여기, 이 정도는 남겨둘 테니까.”
당황하는 유리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으로 열심히 장식을 하고 있던 밀라는 턱으로 오른편에 놓여있던 다양한 모양의 초콜릿을 가리켜 보였다. 유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초콜릿이 놓인 쪽으로 다가가 하나씩 들어보기 시작했다. 눈꽃, 별, 하트. 유리는 밀라가 쓰다 남긴 데코펜으로 조금씩 그 위를 꾸몄다. 눈꽃은 하늘색으로, 별은 노란색으로, 하트는 분홍색으로. 진부하지만, 가장 어울리는 그런 색으로. 겨우 다 끝냈는지, 밀라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은 후,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만세를 외쳤다. 뒤늦게 시작한 유리는 양이 적었기 때문에, 그녀보다 먼저 완성한 후, 뒷정리하고 있었다. 거의 마무리했을 무렵, 유리가 중탕에 이용한 냄비를 치울 때,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다 식은 줄 알고 맨손으로 들어 올렸는데, 인덕션의 남은 열을 생각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유리는 열 손가락으로 전해져오는 엄청난 열에 결국 냄비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행히 밀라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두 명 모두가 다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유리는 뜨거워진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너무 고통스러우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 유리의 상황이 딱 그러하였다. 오히려 뒤늦게 발견한 밀라가 유리의 두 손을 차가운 물에 담가놓았고, 유리는 그제야 자신의 열 손가락이 모두 화상을 입었다는 걸 알았다. 올라오는 통증이, 물의 차가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기에. 밀라는 유리를 힘껏 타박해 보였다. 물론 그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 담겨있었지만.
“조심하지 그랬어! 대회도 얼마 안 남았는데!”
“괜찮아, 손을 많이 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손가락 끝이 계속 아려오긴 했지만, 유리는 걱정하는 밀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유리의 사람을 안심시키는 그 특유의 웃음에, 그녀는 유리의 손을 얼음물에 담가준 뒤, 주방을 나섰다. 아마도 자신의 손가락을 응급처치해주기 위한 구급상자를 찾으러 간 것 같았다. 일요일이라 병원이나 약국도 열지 않았을 텐데, 유리는 오늘 하루는 얌전히 방에만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빅토르에게 들켰다간,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테니까. 자신의 실수인데 밀라까지 혼나는 모습도 보고 싶진 않으니. 밀라는 가지고 온 구급상자를 뒤적거리며 연고와 밴드를 찾아낸 뒤, 유리의 손을 꺼내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아, 물속에서 꺼내니 화끈해지는 통증에 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 표정을 본 밀라는 빠르게 그의 열 손가락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인 유리는 그 모습이 웃겼는지, 계속해서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보였다. 그사이에 유리의 초콜릿을 이쁘게 상자에 포장해 둔 밀라는 그것을 유리에게 내밀며 말했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얼른 들어가. 4대륙 전까지는 나아야 하니까, 꼭 내일 병원 가고!”
밀라에 의해서 무사히 택시까지 태워진 유리는 곧장 집에 도착했다. 혹시나 일어난 빅토르에게 들킬까, 유리는 문을 연 직후, 밴드로 가득한 열 손가락을 등 뒤로 감췄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실내는 한없이 조용했다. 맥커친까지 없는 거 보니, 아무래도 외출할 것 같은데.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유리는, 거실의 커다란 탁자에 놓인 메모를 발견했다.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내용이었다. 저녁도 먼저 먹으라고 쓰여 있는 거 보니, 평소보다는 늦을 것 같았다. 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 피로해진 몸과 밴드투성이의 손가락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밀라가 챙겨준 초콜릿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코트만 벗어둔 채, 침대 위에 누웠다. 언제나와 같은 베개임에도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포근하게 느껴져, 유리는 그대로 잠에 빠지고 말았다. 감겨가는 눈의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초콜릿을 향해 있었다. 흐려 져가는 그의 의식이 허공에 물었다.
나의 숨겨진 선물을 과연 당신은 얼마나 좋아해 줄는지.
―
방을 가득 채우는 빛을 인지하며, 카츠키 유리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인가, 유리는 무거운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문질러가며 남아 있는 잠을 물리치기 위해 노력했다. 손가락엔 어제 밀라가 붙여준 밴드가 남아있었다. 통증은 어제보다 훨씬 덜해졌지만, 오른쪽 검지의 밴드를 호기심에 떼어보니 피가 비치는 것과 같은 붉은 기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역시 병원에 가야겠구나, 유리는 스포츠가방을 챙긴 뒤, 집을 나섰다. 거실의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1시간은 일찍 일어난지라 유리가 방문을 살짝 열어 엿본 빅토르는 어제처럼 곤히 있었다. 들어와서 자신을 깨우지 않은 것 보면, 그 또한 늦은 시간에 들어왔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자신의 인기척에 일어났을 맥커친도 곤히 자는 거 보니 유리의 유추엔 더욱 힘이 실렸다.
훈련장에 도착하기 전, 유리는 일찍부터 문을 연 카페에 들어가 진료받을 만한 병원을 추천받았다. 평소에 시키는 따뜻한 커피와 달리, 이 추운 날씨에 그는 아이스커피를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커피는 마시고 싶고, 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한 유리 나름의 선택이었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뒤, 처방 약까지 받은 유리는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밴드를 숨기기 위한 검은색의 심플한 장갑을 구입했다. 낫는 게 늦어지긴 하겠지만, 훈련할 때만큼은 계속 마주치니만큼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일찍이 나왔음에도 진료 후에 도착하니, 빅토르를 비롯해 대부분의 선수가 이미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유리를 발견한 빅토르는 자신보다 먼저 나갔음에도 늦게 도착한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말없이 빙판 위에 올라오는 유리를 보곤 궁금증을 묻어버렸다. 어느새 유리의 옆으로 다가온 밀라는 장갑이 씌워진 유리의 손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병원 갔다 온 거야? 손은 괜찮대?”
“약 받았으니까 금방 나을 거야, 걱정해줘서 고마워.”
밀라의 물음에 유리는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두어 번 토닥이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더는 마음 쓰지 말라는 그 다운 제스처였다. 밀라는 뒤에서 느껴지는 빅토르의 시선에 재빨리 코치인 야콥에게로 향했다. 주요 점프와 약하다고 생각하는 동작들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고 있던 유리는 빅토르의 요구로 프리 전체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손에 끼고 있는 장갑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빅토르의 시선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오히려 거부했다간 더 의심할 것 같아 결국 승낙한 유리였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연기하던 유리는, 마지막 동작을 언제나처럼 빅토르를 향한 채 끝마쳤다. 아, 오늘만큼은 다른 쪽으로 해야 했는데. 이미 익숙해진 몸은 갑작스러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호기심을 참다못한 빅토르가 빙판으로 들어와 유리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잡힌 손이,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반지를 받았던 그때처럼.
“장갑, 왜 낀 건지 물어봐도 될까?”
“… 그럼 저는 대답하지 않아도 될까요?”
돌아온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았기에, 빅토르는 놓지 않은 유리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아 보였다. 손가락에 힘이 가해지자, 유리는 자신도 모르고 고통의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찰나의 표정을 놓치지 않은 빅토르는 유리가 당황한 틈을 타, 장갑을 벗겨버렸다. 장갑이 벗겨진 유리의 손가락에는 모두 밴드가 붙여져 있었다. 빅토르는 믿기지 않는 듯,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만져보더니, 그 후에 고개를 들어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고개를 숙임으로써 그 시선을 애써 피했지만, 빅토르 또한 그만큼이나 고개를 숙였기에 결국 끝에는 마주하고 말았다. 빅토르는 유리의 손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론 코치로서 그를 케어하지 못한 자신의 부주의함을 통탄했다.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빅토르는 유리에게 최대한 냉정하게 보일 수 있도록 말했다.
“유리, 자기 몸을 관리하는 건 선수의 기본자세야. 당장 내일모레가 4대륙이라고.”
위로를 바란 건 아니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니만큼, 타박한다 해도 견뎌낼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작게 심어져 있던 억울함이 빅토르의 냉정한 충고를 만나 싹을 틔우고 말았다. 물론 중간부터는 자신도 동참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초콜릿을 만들 생각은 아니었고, 아마 그의 초콜릿을 챙긴다며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다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든 합리화고, 변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혼나니까, 유리는 그렇게 서러울 수 없었다. 결국, 그의 눈에선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닦아주지 않아 떨어지는 눈물은 빙판 위에 내려앉아 사라지거나, 굳어버렸다. 아무 말 없이 우는 유리였으니, 이 상황을 그가 이해할 수 있을 린 없었다. 빅토르는 평소와는 다른 태도의 자신에게 서운한 것일까,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만큼은 무를 생각이 없었다. 러시아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나가는 대회다. 혹시나 그에게 나쁜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의 원인은 유리를 갑자기 낯선 환경으로 끌고 온 자신에게 있을 터였다. 그래서 더욱 차갑게 대한 것이다. 다 그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유리가 그런 빅토르의 의중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유리는 달아나는 것을 선택했다. 빅토르의 손에는 유리의 한쪽 장갑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다가온 것은 바로 멀찍이서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밀라였다. 그녀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신중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 사실 유리 손 다친 거 나 때문이야. 내가 초콜릿 만드는 거 도와 달라 하는 바람에. 그러니까 너무 혼내지 마.”
“밀라, 너…”
“그리고! 그러다간 유리가 모처럼 직접 만든 초콜릿 못 받을지도 모른다고?”
죄를 고백한 밀라는 그제야 후련해진 듯, 다시 원래 모습대로 돌아와 빅토르에게 말한 후 다시 야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빅토르는 밀라를 타박하려던 것도 잠시, 유리가 직접 만든 초콜릿이라는 소리를 듣고선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아, 그래서 울었던 걸까. 빅토르는 유리가 눈물을 흘린 더 많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히 자신에게 혼났기 때문에만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섭섭했던 거겠지, 자신이 알아주지 못한 것이.
―
“유리, 나 왔어.”
“….”
빙판을 뛰쳐나간 유리가 있던 곳은 바로 그의 침대였다. 아직 낯선 러시아에서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장소는 한정적이었으니, 빅토르는 어렵지 않게 유리를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 다정하게 말하는 그에게, 유리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꼼짝 않고 있었다. 유리 나름의 저항이었다. 아니, 사실 저항이라기보단 그렇게 나와 버린 게 뒤늦게야 창피했다는 게 더 맞겠지만. 밀라에게 들은 내용을 토대로, 빅토르는 책상 위에 놓인 예쁘게 포장된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이 그가 직접 만든 초콜릿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빅토르는 유리 몰래 살짝 그것을 열어본 후, 내용물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손에 집은 것은 눈꽃 모양의 초콜릿이었다. 빅토르는 그것을 들어 신기한 듯 살펴본 뒤, 한입에 먹은 후, 자신을 보고 있지는 않으나, 집중하고 있는 유리에게 말했다.
“눈꽃 모양은 우리네. 땅보다도 얼음 위에서 더 많이 살아가는.”
유리는 빅토르의 말에 움찔거렸으나, 고개를 들어 보이진 않았다. 빅토르는 이 정도로는 안 되려나, 싶어 다음 초콜릿을 꺼내 보였다. 별 모양의 그것을. 빅토르는 별을 아까의 눈꽃처럼 또 한입에 넣어 먹곤 말했다. 유리는 빅토르가 먹고 있는 그 소리 하나에도 집중하고 있었다.
“음, 별 모양은 나려나? 유리에게 언제나 빛나는.”
빅토르의 자아도취적인 말에 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파묻은 베개 안에서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 소리가 빈 공간 사이로 빠져나와 빅토르에게 들렸고, 이제 좀 나아진 걸까 싶어 그는 마지막 모양을 꺼내 들곤 유리에게 다가갔다. 유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곤, 결국 얼굴을 들어 보였다. 그곳에는 눈물과 열로 인해 붉어진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빅토르는 그런 유리의 입에 초콜릿을 반쯤 물려주곤,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이 하트는 나를 향한 유리의 사랑이려나?”
그리곤 유리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으며, 남은 반을 깨물어 먹어버렸다. 초콜릿을 머금은 서로의 입술이 닿아, 그 진함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달콤한 초콜릿의 맛이 느껴지기도 전에, 더 많은 씁쓸함을 담은 빅토르의 맛이 유리의 입안을 장악하고 말았다. 우느라 받은 열에 빅토르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몽롱해진 유리는 그를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행위를 받아들이며 생각했다.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초콜릿 그 이상의 것.
눈꽃, 별 그리고
사랑.
FIN.

안녕하세요, 베리입니다!
우선 뒤늦게나마 합작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전에 발렌타인데이라는 소재로 한 번 연성을 했던지라,
자신이 없었지만 마감 며칠 전에 떠오른 소재로 최대한 연성 해 보았습니다 ^^*
생각보다 길어지긴 했지만, 부디 읽어주시는 분들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제 연성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다른 분들의 연성을 읽으러 가야겠어요 ! ㅎㅎ - 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