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EAN-JACOUES LER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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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IL LEE
발렌타인데이에 눈이 올까요?
-달콤하게 시작하고, 또 이어지는 이야기-
“후우-.”
가슴 안에 있었던 꽉 찬 숨을 한 번에 뱉어 내니 가뜩이나 새하얀 세상에 가벼운 입김이 넘실거리며 떠오른다. 벌써 2월인데 이렇게 추워도 괜찮은 걸까. 이런 말도 안되는 날씨는 한국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왜인지 올해 파리는 유독 바람이 매섭다. 하하, 이러다가 눈이라도 내리는 건 아닐까. 설마 그럴리는 없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불안하게 회색으로 물들어 있던 하늘에서 새하얗고, 자그마한 차가운 무언가가 톡하고 떨어져 내렸다. 시작은 잔잔했지만 이내 눈송이도 더욱 그 크기를 키워 나가는 것이 아마 지금 내리는 건 무조건 쌓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눈 치우기 귀찮은데.
아름다운 광경보다야 나중에 겪게될 현실에 더 초점이 맞춰지기는 했으나 승길은 그래도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들고 나왔던 쓰레기 봉투를 대충 벽 옆에 세워두고 다시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 눈 와요.”
그저 덤덤할 뿐이었지만 그 한마디로 인해 공방에 있던 동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창가로 달라붙어 함박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26살의 승길은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였다. 그러나 부티끄 한정으로 그는 막내였다. 그것도 다른 동료들과 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그런데 평균연령 서른을 훌쩍 넘긴 아저씨들이 고작 때늦은 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을 빛내며 탄성을 지르는 모습이란. 확실히 이 시기에는 평소보다 더 빡세게 굴려져서 그런가 사소한 거 하나가 금방 유흥이 되고 즐거움이 된다.
“승길! 이거 쌓일 것 같아?”
동료중 한 명이 저를 찾으며 묻는 말에 승길은 별 다른 시선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승길의 예감은 잘 맞는 편이었다. 그럼 분명 이번에도 그럴 확률이 컸다.
그 말을 듣고 흥분한 동료들은 이제 뒷정리는 뒷전으로 하고 본격적으로 수다에 매진했다.
눈이 쌓인 다면 뭘 할까? 눈 싸움? 눈 사람 만들기? 나, 나! 이글루 만들어 보는 거 로망이었어!
기본 적인 얘기부터 가당찮은 뜬금없는 소리까지. 아무리 그래도 이글루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쌓일 것 같진 않은데.
그러나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그런 이야기에 딴지 걸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기에. 결국 어느 여고생 못지않은 아저씨들의 수다를 정지시킨 장본인은 이 부티끄의 주인이자 대장님 되시겠다.
“이 자식들아, 어디 한 번 밤새도록 탬퍼링이나 같이 해볼까?”
험상궂은 외모와 더불어 낮고 짙게 깔린 목소리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위압적이었는데
그 목소리가 말하는 내용은 더욱더 악몽과 같았다.
결국 그들은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며 빠릿빠릿하게 저들이 사용한 기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환복 또한 빠르게,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인사하며 가게를 빠져나가기 까지 불과 10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 모두 빠져 나간 가운데 승길 만은 유유히 원래 늘어져 있던 기구대신 다른 기구를 꺼내와 다시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장은 그걸 보며 물었다.
“오늘도 연습 할 거냐?”
“네. 내일이 발렌타인 데이니까요.”
대답은 망설임 없었고, 빨랐다. 이유 또한 타당했다.
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항상 쓰고 다니는 카키색 뉴스보이캡을 머리에 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문단속 꼼꼼히 하는 거 잊지 말고.”
“네.”
“그럼, 수고해라.”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쿵. 하고 철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승길은 바로 문을 잠그진 않았다.
한 번 작업을 시작하면 거기에 집중해 주위를 보지 못하는 것. 그게 승길 최대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인 특징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만들고 있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초콜릿인 트뤼플.
이유로 내뱉은 이벤트를 생각한다면 수수한 것 일지도 모르나 그렇기에 더욱 승길은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 트뤼플을 선택했다. 달콤한 초콜릿 향이 금새 공방안을 가득 채웠다. 공정중인 초코릿은 굉장히 뜨겁지만 이것 또한 이젠 익숙해진 감각이다. 승길은 그렇게 금새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부산스럽지 않고 단정하게 트뤼플 한 판을 완성했고, 그런 다음에야 가게 문이 아직 잠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아.”
문을 닫기 위해 그 곳으로 다가가니 승길은 문득 내가 쓰레기를 버렸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닫혀 있는 문을 걸어 잠그는 대신 열어 젖히는 것을 선택했고, 그 곳에는 역시나 차가운 공기와 더불어 새하얀 눈이 쌓인 딱딱한 쓰레기 봉투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내 정신이야. 부티끄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시간에 사람이 돌아다닐 것 같진 않다. 게다가 금방 다녀 올건데 뭐.
승길은 그런 생각으로 문을 잠그진 않고 그저 닫아놓은 채로 쓰레기를 들고 터벅터벅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그 짧은 사이에 눈이 제법 쌓였다. 얇은 스니커즈 사이로 그 한기가 느껴졌다. 추워라.
승길은 추위를 보통 사람보다도 더 많이 타는 체질이었고, 그 때문에 지금 날씨또한 그에게는 고역이었다.
심지어 해까지 떨어져 낮보다도 훨씬 뚝 떨어진 새벽 기운.
“하아-.”
처음 나왔을 때 보다 더 새하얀 입김이 새까만 공기 중으로 넘실거렸다. 이윽고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던 쓰레기장에 도착했다. 승길이 끄응 거리는 신음소리를 들은 것도 그 쯤이었다. 뭐지? 밤이고, 조용했기에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짐승과는 종이 다른 신음소리. 분명 저와 같은 사람의 것이었다.
그러나 왜 갑자기 사람의 소리가? 적어도 일반적인 상황이 아닌 것 쯤이야 간단하게 알 수 있었다.
근원지는 어디지? 어떤 사람이지? 만에 하는 경우 제압할 수 있을까?
파리라는 나라는 낭만의 도시라는 로맨틱한 이름과는 달리 치안이 좋지 않은 도시였다.
그랬기에 그저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 또한 뾰족하게 기를 세우는데
하물며 시야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는 상황에 이런 불안한 일이라니.
그러나 승길은 쓰레기를 내려놓으며 깨달았다.
그 불안한 소리가 다름 아닌 그저 어린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호소일 뿐임을.
쓰레기를 버리러 그 가까이 다가가니 쓰레기라곤 생각할 수 없는 덩치 큰 무언가가 거기에 있었다.
그 때문에 당황했지만 승길은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손가락을.
이내 가늘지만 뼈대 있는 손가락이 그 무언가를 쿡쿡 찔렀다.
오래 방치되 있던걸까 차가웠지만 동시에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부드럽지만 동시에 딱딱하다. 그 모든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이건 사람이다.
그리고 쿡쿡 찌를때마다 터지는 목소리 또한 익숙한 것이. 저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던 그 신음과 아주 흡사하다.
“뭐야.”
한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어두침침한 시야에 희미하게남아 그 사람의 얼굴이 승길의 눈에 담겼다.
커다란 덩치와 짧은 머리카락. 그리고 굵게 울리는 신음소리를 봐서 이 사람은 남자였다.
승길은 남자에게 코를 가까이 해 킁킁 냄새를 맡았다. 혹시나 피 냄새가 나나하고. 누군가 에게는 우스운 행위로 비춰질수도 있었으나 승길에게는 중요했다. 칼에 찌린, 혹은 강한 폭행으로 인해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들은 굳이 영화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이 곳에 있는 2년 동안 그는 여러 노숙자들과 방랑자들을 보았고 어느 적에는 실제 시체를 눈에 담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남자에게선 피냄새가 나지 않았다.
나는 것은 쓰레기 냄새와 그것과는 사뭇 종류가 다른 또 다른 악취 뿐이었다.
“귀찮게 시리????.”
승길은 깊게 한 숨을 내쉬고 쓰레기더미 위에서 남자를 끌어내었다.
생각보다 더욱 간단하게 끌려오는 몸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승길이었다.
이어 그는 끌어낸 남자를 기를 써 어깨에 둘러메었다.
그 또한 무거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생각보다 들만한 것이 아무래도 남자는 겉으로 보이는 체격보다
더 마른 편인가 보다. 승길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으챠.”
승길이 남자를 데리고 돌아온 곳은 자신이 일하는 부티끄 바로 위층에 있는 자신의 집이었다.
남자를 대충 바닥에 눕힌다음 불을 켰다. 그리고 보이는 남자의 모습은 말 그대로 거지꼴이 다름 없었다.
온 몸에서 나는 악취는 온도가 높아지자 더욱 선명하게 존재감을 자랑했고 수더분한 머리는 떡이지다 못해 한 순간 재벌 반열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기름이 번들거렸다.
그 와중 계속되던 신음이 멈췄다는 것을 깨닫고 승길은 순간 그 사이 남자가 죽기라도 한 줄 알았다.
그러나 다행이도 코 밑에 손을 데어봤을 때 호흡은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에라이.”
정체도 모르는 남자가 재수없게 심장을 왔다갔다 시키고 있다. 순수한 호의가 한순간 잔혹한 살인범으로 변하는 전개는 그리 달갑지 않다. 그리고 이 어이없는 사태에 승길은 저속한 말을 중얼거리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투명한 물 위에 새하얀 수건이 동동 떠 있는 커다란 대야 하나가 들려 있었고, 승길은 수건을 들어 쭈욱 물을 짜낸 후 그것을 남자의 볼에 대었다.
스윽스윽. 새하얀 오물이 새하얀 수건을 더럽히기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남자의 얼굴은 점점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냄새나는 몸을 그냥 방에 두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정신 없는 사람을 그냥 욕조에 던져 넣을 정도로 자비가 없지는 않았다.
결국 팬티 안을 제외한 전신을 다 닦는데 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 되긴 했으나 그래도 처음 보다야 훨씬 나아진 그 모습에 승길은 뿌듯함을 느끼며 다시 공방으로 내려갔다. 아직 주방 정리를 마치지 않은 탓이었다. 승길은 평소보다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주방을 정리하고 문단속을 한 후 완성된 트뤼플을 들고 집으로 올라왔다.
[왔, 씨발…]
그리고 집 문을 열었을 때, 승길은 본능적으로 본토의 욕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왜냐면 방금 전 까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기 위해서 코 밑에 숨결을 확인까지 해야했던 남자가 어느새 일어나 눈을 땡그랗게 뜬 채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과 얼굴은 어느 정도 닦아 놨다지만 기름진 덥수룩한 머리는 아직 그대로였다. 그 정신없는 앞머리가 눈을 가리고 있는 와중에도 안광만은 뚜렸하다.그게 얼마나 호러인지 승길은 스스로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았고, 쿵 하는 소리 동시에 남자는 움찔 거리며 어깨를 들썩 거렸다.
아주 잠시 말 없는 시간이 흐르고, 승길은 이제 남자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즉시 무뚝뚝한 얼굴로 장난기가 발동한 승길은 아마도 그 무언가로 보이는 손에 든 것을 열심히 위, 아래, 좌, 우로 움직였고 자연스럽게 남자의 시선을 거기를 따랐다. 그 무언가는 다름아닌 승길이 갓 만들어 들고 올라온 트뤼플이었다. 한 마디를 툭 뱉었다.
“먹을래?”
미친듯이 흔드는 고개에 문득, 여기서 안 돼라고 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지금 이 상황에 역시 그건 너무 하다라는 생각이 드는 승길이었다. 남자는 승길이 트뤼플을 건네기 무섭게 마구잡이로 그것들을 입에 쑤셔넣었다. 그래그래, 안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역시나 였구나. 종류가 조금 어긋나긴 했지만 그래도 잘 먹으니까 좋네.
승길은 그런 남자의 머리로 손을 뻗으려다가 이내 말았다. 아무리 감상에 젖을 상황이라고 해도 저 머리는 아니다. 음식을 만드는 손에게 있어 저 머리는 불경이다. 대신 승길은 그대로 손을 내려 손가락을 동그렇게 만든 후, 놓았다.
“아!”
“그거 다 먹으면 힘내서 씻고 나와라.”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싫어? 그럼 먹던 거 내 놔.”
“씻을게요! 씻을게요!”
먹을 걸 뺐기는 건 어지간히 괴로운가보다.
남자는 정말 쉬지 않고 트뤼플을 입 안으로 쑤셔넣었고 그로인해 처음부터 그리 많은 양이 아니었던 그것들은 금새 동이 나 바닥을 보였다.
**
솔직히 말하면 아직 한 참 모자랐다. 전혀 힘 나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히 몇 분 전 보다는 훨씬 살만하다.
게다가 눈 앞에 있는 남자의 의도도 전혀 모르겠다.
분명 남자와 저는 이번에 초면일텐데 애초에 이 남자는 누구고, 여기는 어딘가.
설마 길거리에 쓰러져서 정신을 도중 인신매매라도 당하는 걸까? 그러나 그렇다고 생각하기에 주변 풍경은 평범한 가정집에 불과했다. 게다가 어디서 가져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준 초콜릿 또한 맛있었다.
정말로, 굉장히 엄청나게.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초콜릿은 또 처음이었다.
설령 이게 진짜 인신매매라 할지라도 어차피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길거리에서 아사 확정이었다.
어차피 그럴거라면 죽이더라도 마지막에 맛있는 걸 준 남자의 말을 듣겠다.
**
남자가 화장실문을 열었다. 쓸데없이 웅장했다.
**
“어...저 다 씻었는데요.”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승길이 시선을 떼지 않은 그대로 무신경하게 입을 열었다.
“앞에 옷이랑 속옷 있지? 그거 입어.”
승길의 손에는 맥주 한 캔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그걸 묘하게 바라보다가 바닥에 늘어져 있는 옷가지를 발견하고는 주어 들었고,
속옷부터 하나하나 몸을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옷을 다 입었을 때, 낯선느낌에 남자는 의아한 나머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소심한 어투로 승길을 불렀다.
“저, 저기-.”
“응?”
“그...속옷이 작은 것, 같..아요.”
남자가 말을 마친 순간 승길의 눈이 짜게 식기 시작하며 시선을 정확히 남자의 생식기로 돌렸다.
[망할 서양인]
“예?”
“그냥 처 입으라고.”
“옙.”
남자는 그 한마디로 인해 허겁지겁 준비된 옷을 껴입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다른 옷도 미묘하게 길이가 맞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사이즈는 딱이었지만. 승길은 그 모습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또다시 한국어로 중얼거리는 비속어에 당연히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것이 좋지 않은 말이라는 정도야 표정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야.”
“넵.”
이제는 대답도 자동적이었다.
“이리와봐.”
손가락을 까딱이며 저를 부르는 말에 남자는 대답대신 쪼르르 달려가 그 앞에 섰고, 다시 한 번 짜증섞인 눈으로 승길이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자 그는 용케 알아듣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히 앉았다.
“머리 말리는 법도 모르냐.”
승길은 남자 목에 걸쳐 있던 수건을 들어 그대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부비기 시작했고
뜻밖의 상황에 한순간 남자의 동공이 커졌지만 그것은 이내 기분좋은 감각으로 노고노곤하게 풀리게 되었다. 그렇게 가만히 손길을 받고 있는 와중 꾹 닫혀 있던 승길의 입이 열렸다.
“이름은?”
“에, 장 자크 르로와 입니다.”
“나이는?”
“...20이요.”
쯧. 의도치 않았건만 저절로 혀가 처지는 나이였다.
도대체 그 나이에 무슨 일이 있길래 길거리도 아니고 쓰레기장에서 그 꼬라지로 쓰러져 있던 건데.
“부모님은?”
지금 상황에서는 예민할 법한 주제이기도 했으나 승길은 개의치 않고 물었다. 남자, 아니 장은 입을 꾹 다문 채 그 질문에 답하는 걸 주저했고, 때문에 승길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나 하는 불안을 뒤로하고 애써 담담한 척 머리를 부비는 손에 힘을 가했다.
“...두 분 다 캐나다에.”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뭐? 너 캐나다 인이야?”
“네.”
이름부터가 프랑스식이 아니기는 했으나 한국인인 승길에게 서양인들 이름은 다 거기서 거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프랑스에?”
“...”
이번에는 확실하게 주저하고 있었다. 때마침 수건질도 끝났겠다 승길은 드라이기를 찾기 위해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서랍을 뒤지는 사이 장이 입을 열었다.
“옷을 만들고 싶어서...디자인을 배우고 싶어서요.”
승길은 금새 드라이기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꺼내들며 승길은 처음으로 장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입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나랑 똑같네.”
정확히 나는 초콜릿이지만. 승길이 드라이기 코드를 꼽고 전원을 켜 뜨거운 바람을 거리를 두고 장의 머리카락으로 흘러내리게 했다. 밤인 것을 감안하며 세기를 낮춘지라 소리는 그다지 크게 울리지 않았고, 그 의미는 머리를 말리면서 둘이 대화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밥은 왜 못 먹고 다녀?”
“아...그게 말하자면 좀 긴데.”
“해 봐. 네 얘기나 좀 들어보자.”
“그럼, 네.”
그렇게 시작한 장의 이야기는 뻔하디 뻔한 클리셰 덩어리인 이야기 였지만 그랬기에 더욱 잔혹할 현실이기도 했다. 어릴적부터 옷에 관심이 많던 장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안일하게 꿈은 꾸고 있었지만 패기가 없었고, 게다가 집안의 반대또한 상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씩 진지하게 꿈을 키워나가며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렇게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쪽지 한 장 만을 남기고 프랑스로 건너 온 게 일주일 전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큰 비행기 표 값으로 인해 이미 경제에 큰 위기가 닥친 것도 모자라 그 과정에도 소매치기 까지 당해버려 간신히 여권은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 밖에 챙겨온 전재산은 모두 잃고 불어는 확실히 할 수 있지만 신원이 확실치가 않아 아르바이트도 구하지 못하고 혈혈단신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다 정말 아사직전이라 느끼고 쓰러진 것이 전의 그 상황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다 들은 승길은 서툴게나마 장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져서 퉁명스럽게 뱉었다.
“그럼 너, 우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할래?”
“에? 그, 그...그쪽?”
“건방지게 그 쪽은 무슨 승길형이라고 불러.”
“...형? 세상에 저보다 나이가 많다는 소리에요 그건?”
“이름 이승길. 나이는 미안하게도 너 보다 6살이나 더 많은 26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존칭 붙이고 호칭은 형이라고 해.”
“...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장의 표정은 아리송했지만 그 멍청한 표정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승길은 재차 확인을 위해 물었다.
“그래서, 할꺼야 말꺼야? 참고로 내가 일하는 가게는 여기 바로 밑에 있는 초콜릿 부티끄고 난 거기 쇼콜라티에. 그저 먹는 것만 할 줄 아는 네가 할 일은 시식하고 막일. 일명 잡일이다. 싫으면 얘기하고 하고 싶으면 사장님한테 얘기해 놓을게 직원 구했다고.”
“할게요! 하고싶어요! 하게 해주세요!”
“오냐.”
그렇게 승길은 그 날 스스로를 제이제이라 불러달라는 캐나다산 대형견을 줍게 되었다.
**
원래부터 사교성이 뛰어나고 빠릿빠릿한 성격인지 제이제이는 금방 부티끄내에 적응했고, 그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막내라는 이름으로 그 사이에서 엄청나게 이쁨받고 있었다.
게다가 단 것도 엄청나게 좋아하는지 동료들과 대장님 승길이 건네는 시식용 초콜릿도 전혀 거리끼지 않고 언제나 성대한 양을 위장에 채워넣는데도 항상 맛있다는 말을 연발했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이 정확한 의견으로 비추어지지는 않더라도 그저 맛있게 먹는 모습 그 하나로도 그들은 뿌듯함을 느꼈고, 때문에 성격좋고 애교많은 제이제이가 그 안에서 사랑받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장.”
“네! 형!”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유독 제이제이는 승길을 따랐다. 어찌보면 주운 장본인이니 당연할 법도 했으나 그 이상으로 제이제이는 승길에게 충실했다. 아니 그것을 충실하다 표현하는 것이 옳을까. 어쨌든 다른 동료들과 손님을 대할 때와는 확실히 다른 태도인 것만은 분명했다. 지금도 정말 사람인 주제에 강아진인척을 하며 꼬리를 살랑살랑 거리는 저 남정네를 어찌할꼬.
동료들은 제 귀여운 막내가 성격나쁜 전 막내에게 단단히 찍혀버린 모습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제이제이! 여기 쓰레기좀 버리고 와라!”
“넵! 알겠슴다!”
힘찬 기합을 내며 양손에 각각 쓰레기 봉투 두개씩을 들고 씩씩나게 나서는 등을 승길이 바라보았다.
그 날부터 이제 1년정도 인가? 아무튼 그 정도. 해준것이라곤 그저 밥 안굶기고 가끔 개인적으로 초콜릿이나 만들어 준 것 뿐인데 제이제이의 몸은 처음 봤을 때 그 볼품없이 빼빼마른 몸과 동일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다부지게 변해 있었다.
원래부터 떡대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그게 저 정도일줄은 몰랐다. 나 몰래 운동이라도 하나?
그러나 24시간을 붙어있는 내내 깨달은 건 제이제이 저 녀석도 은근히 운동 안 한다는 것이었다.
가게에 있을 때 만큼은 쉬지 않고 청소, 매대정리, 쓰레기 버리기 등등등 여러 일을 도맡아 처리 하느라 정신 없이 몸을 움직이긴 했으나 그 외에 시간에 따로 운동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항상 하는 것이라곤 그 작은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손 바닥 두 개 정도를 합쳐놓은 넓이에 수첩에 정신없는 무언가를 그린다는 정도.
그건 사물이 될 때도, 음식이 될 때고, 인물이 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그 알 수 없는 선이 그려내는 것은 옷이었다. 여러가지 각양각색을 자랑하는 디자인들. 개중에는 눈에 익은 스타일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아무튼 여러 종류가 그 노트 안에는 빼곡히 그려져 있었고, 승길은 집에 돌아와 맥주 한 캔을 하며 제이제이의 그 모습을 보는 것을 제법 좋아했다. 패션아카데미에 지원할 만한 등록금을 벌 때 까지 제이제이는 이 곳에서 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생각해보면 그 뒤에도 돈은 필요할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할 것인지.
역시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모르는 단순한 녀석이다. 그러나 그 바보같이 저돌적인 눈 만은 꼭 어느 적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드는 모양이라 간지러운 느낌에 당시 승길은 자리를 피했었고, 동료들과 대장은 꼭 승길이 처음 들어올 때와 비슷한 녀석이라면서 애써 도망친 그를 놀려댔었다. 부정할 수 없었기에, 더욱 민망했던 건 비밀이 될 수 없었지만 비밀이고 싶었다.
**
“흐흠흐-.”
양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아무런 낭만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쓰레기일 뿐인데 그것을 들고 쓰레기장으로 향하는 제이제이의 발걸음은 소풍가는 어린아이마냥 가볍고 흥겨웠다. 이제 이 가게에서 일한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처음에는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했지만 어딜보나 저에겐 처음부터 거부권이라는 것이 없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좋은 조건을 스스로 걷어찰 정도로 자신은 바보가 아니었다.
가게는 아늑하고, 초콜릿은 환상적으로 맛있고, 동료들도 모두 좋은 사람투성이다. 게다가 막내라는 이유로 잔뜩 이쁨도 받고 있으니 이쯤되면 오히려 신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는 정말 말 그대로 앞 날이 깜깜했었는데, 그저 절망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죽을 뻔 했던 자신을 승길이 구해주었다. 바로 이, 쓰레기 장에서.
툭.
쓰레기가 모아져 산이 된 공간. 바로 여기 위에 자신이 있었다.
그것도 배고파 죽기 바로 직전의 모양으로. 그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살아나는 것 조차 무서웠다. 어차피 부여잡아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을텐데.
그럴꺼면 그냥 빨리 죽어버리는게 더 편하지 않을 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는데, 어쨌든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하루하루가 그저 평화롭고 행복했다. 기본적으로 소란스럽지만 일을 할 때에는 누구보다 진중한 동료들이 모여 있는 달콤한 공방이 좋았고, 정리가 서툴러 부산스러워 보이기는 하나 그 만의 소박한 멋이 있고 따뜻함이 있는 그 집도 참 좋았다. 그러나 그랬기에 사뭇 두려움이 들곤 했다. 이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이 변한다면 어쩌나. 그렇게 되면 또 죽고 싶어 질지도 모를텐데.
쓰레기를 버린지는 한 참 이었으나 그 자리에 구부려 앉아 멍하게 앞을 보고 있던 제이제이의 눈동자가 탁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돌아다니면서 쓰기 위해 하나 더 구입한 손바닥 만한 크기의 노트가 그 자리에 있다. 승길이 거실에서 술을 마실 때 그림을 그리는 저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은 옛적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어쩔 수 없어도...이건 모를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제이제이는 일어서 다시 가게로 향했다. 돌아선 그 등 뒤로 늘어진 쓰레기장 사이에 회색 노트 한 권이 엉망진창으로 끼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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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요즘 왜 그림 안그려?”
며칠전부터 장이 이상했다. 평소보다 더 제 눈치를 보고 그러면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더 살갑게 굴며 다가오고 받아주고 있으면 은근슬쩍 제 몸뚱아리를 붙여 오기도 하며 자꾸만 되먹지도 않은 아양을 떨어댔다. 그걸로만 마치면 잘 모르겠는데 장은 계속 무언가가 불언한 사람 같아 보였다. 잘 때 소파에서 자던 장이 불편하다며 침대로 기어 들어오는 일은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승길도 딱히 제제를 하진 않았다. 제제에게 저 소파는 너무 작았다. 침대로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명이 눕고 정말 아주 조금 공간이 남을 정도의 크기는 적절했다. 그런데 얼마전부터는 그 간격이 점점 좁아지기 시작하는 것도 모자라서 자꾸만 껴안아 오는 것이 불순한 의도라기 보다는 꼭 어딘가 불안한 아이가 엄마를 찾듯 장은 그렇게 승길을 원했다. 그럴때마다 승길은 그런 장을 마주 앉아주며 등을 쓰다듬어내려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계속 그렇게 피곤에 지쳐 잠이 들 때까지.
입을 맞춰온 것은 그 다음이었다. 장은 쓰레기를 버리고 저는 연습을 위해 사용했던 기구들을 설거지 하고. 그 날은 장이 쓰레기장에 갔다오는 것이 더 빨랐고, 입 맞춤이 이뤄진 것은 장이 손을 씻기 위해 개수대로 다가온 그 순간이었다. 혀를 사용한 농밀하고 짙은 키스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입술과 입술이 맞 닿은 입맞춤. 그것이 두근거리기보다는 슬프게 느껴져서, 그것이 아련해서 동정심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승길은 젖은 손을 들어서 그 뒷목을 잡고 키스했다. 어설프게 섞여 오는 혀가 노력은 가상하지만 우스워서 승길은 피식 바람빠진 웃음 소리를 내며 그를 놓아준 후 다시 담담하게 설거지에 임했다. 장 또한 옆에서 도왔다. 그 순간만큼은 단란한, 그런 시간이었다.
그 날 부터 종종 입맞춤을 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딱히 합의하에 이루어진 관계같은 것도 아니었지만 누군가 그런 분위기가 되고 입을 맞추면 그 때는 피하지 않고 정중하게 임했다. 그것은 단순한 임맞춤일 때도 짙은 키스일때도 아니면 둘 다 일 때도 있었고, 그 기묘한 상황에서 승길은 어느 날 소파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 박힌 장의 녹색 노트를 발견했다. 원래 이걸 이렇게 아무렇게 던져 놨던 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역시 어느 곳에도 그런 기억은 없다. 그래서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당황하며 아무말 못할줄은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어...그게. 음…”
말 어미를 늘리기만 할 뿐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장을 승길은 말 없이 바라만 보았고, 이내 이어진 대회에 그는 처음으로 손을 들었다.
“저 이제 디자인 안 하려고요.”
“...갑자기 왜?”
“내가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호기롭게 덤비긴 했는데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동경하는 디자이너들 같은 작품은 못 만들 게 뻔하고...그냥 지금 이렇게 아르바이트하면서 형이랑 노닥거리는 지금이 제일 좋아요. 아, 그럼 김에 카페 차리는 거나 한 번 공부해 볼까요? 그럼 거기에 형이 만든 초콜릿도 같이 팔고-.”
더 이상 들어줄 필요 없다는 듯 승길의 주먹이 장의 볼을 강타했다. 퍼억도 아니고 뻐억 소리가 울리는 게 아무래도 단단히 맞은 것이 분명하다. 한순간 퍼지는 아픔에 현실감각이 돌아오고 장은 아픔 뺨을 감싸곤 충격받은 얼굴로 승, 승길이형? 이라 떨리는 목소리로 승길을 불렀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재능 그 딴 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 어리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생각 없는 티를 내면 창피하지도 않냐? 스스로가 한심하단 생각이 조금도 안 들어? 네 옷 만들고 싶어서, 꿈 이루고 싶어서 성공하겠다고 메모한 장 남기고 프랑스로 왔다며. 그런데 왜 네 옷을 만들겠다는 애가 다른 사람 되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서 끙끙 앓으면서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충격받은 장의 얼굴에 승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아하며 말을 이었다. 얼굴을 강타한 손이 욱신욱신 거렸지만 지금은 머리에 너무 많은 피가 쏠려 그런가 그다지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이 좋아? 카페? 웃기지도 않은 네 거지같은 소망에 버릴 쓸데없는 초콜릿은 딴 데 가서 알아봐. 네 짐 싸고 당장 여기서 꺼져. 내 직장이 네 놀이터냐? 우리가 하는 일이 너한테는 그저 재미있고 우스운 장난질로 보여?”
“아, 아니 형. 전, 그런 의미가 아니고-.”
“됐으니까 내일부터 가게도 나오지 마. 너 같이 근성없는 새끼 같은 거 우리 가게엔 필요없다.”
단호하고 냉정한 한마디 한마디가 아프게 장의 가슴팍에 박여왔지만 모두 다 맡는 말이라 무어라 입을 열 재간조차 부릴 수 없었다. 승길은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에서 가방 하나를 꺼내 던진 후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이렇게 막상 얘기는 해도 나가느냐 나가지않느냐는 장의 선택이었다.
뻔뻔하게 남아있는 것도 장의 성격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였다. 그런데 그는 멍하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 그 앞에 덩그러니 놓인 가방을 손에 들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동안 집 구석구석 장의 물건은 여러 곳에 박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담담하게 하나하나 수거해 나아갔다. 정말 신기하게도, 덤덤했다. 그러다 툭, 손 끝에 바로 그 노트가 닿았다. 장은 그것을 들었고, 페이지를 펼쳤다. 그 어느 곳에도 제 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 이렇게 소중한 거였는데 그렇게 쉽게 놓아버리려했다. 자신이 너무 나약해서, 그래서, 서툴게 어른인 척을 하려다 결국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에게 덕지덕지 상처를 남겨 버리고 말았다.
그걸 보고 장은 울었다. 노트를 품에 꼭 껴안고서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승길은 시끄럽다 소리치지 않았다. 어둠속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눈망울 또한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그 날, 새벽에 눈이 내렸다. 그리고 그 날, 장 자크 르로와가 떠났다. 그 둘이 맞이한 두 번째 발렌타인이었다.
**
“하아-.”
본격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기전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분명 하늘은 회색인데 이상하게 공기는 단내가 나는 것 같다. 이 상태면 오늘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데. 아, 그럼 좋겠다. 추우면 그나마 좀 덜 기어나오지 않을 까. 정말 바야흐로 커플들을 위한 그 날이 돌아왔다. 그리고 32살. 본래 집안의 재력을 이용해 국내에서 손쉽게 창업에 성공한 젊은 사장이자 주목받는 쇼콜라티에 이승길은 무료한 얼굴로 가게 영업을 시작했다. 가게에는 승길 혼자밖에 없다. 원래는 다른 직원들도 함께 있지만 오늘 같은 날은 미리 만들어 놓은 예약 초콜릿만 판매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굳이 나오지 않아도 좋다고 연락을 취해놓은 상태다.
가게는 미리 열었지만 사실 아직 예약 손님들이 찾아오기에는 이른 시각이다. 그 사실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 승길은 여유롭게 카운터에 앉아 가판대에서 사들고 온 잡지를 펴 읽었다.
[요즘 가장 핫 한 의류 브랜드J.J Style의 젊은 사장이자 디자이너 제이제이 그의 끝 없는 가능성은 어디까지?]
매끄러운 잡지 표면 위에 인쇄된 얼굴을 보며 승길은 중얼거렸다.
“나이를 먹은 거냐 아니면 사진이 실물보다 못 한 거냐…”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승길은 탁 소리를 잡지를 덮은 후 대충 빈 자리 아무데나 던져 놓았다. 유리창 밖으로 이 쪽을 향해 걸어오는 인영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 발이 이내 가게 앞에 멈췄고, 코트 위로도 보이는 다부진 팔이 기다란 목제 손잡이를 잡고 안으로 밀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그 어색한 한국어에, 승길은 살풋 웃음이 터졌다.
“어서와.”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