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IXTOR NIKIFOR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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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I KATSUKI
어느 겨울 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가득 쌓인 눈들은 발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뽀드득 뽀드득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정면에서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은 안경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아프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낯설만큼 변해있었지만 무척이나 익숙하고, 또 편안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유리는 소꿉친구로부터의 연락을 받고는 어렸을 적 연습했던 아이스 링크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유리가 링크장 앞에 도착했을 때, 그 문 앞에는 한 남자아이가 서있었다. 그 남자아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바람에 흩날리는 은발은 요정의 것과 견주어도 될 만큼 반짝였고, 에메랄드 빛깔이 섞인 그 아이의 푸른 눈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아이는 이곳에 꽤나 오래 서있었는지 안 그래도 하얀 것 같은 피부는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두 볼은 빨갛게 얼어붙어있었다. 유리는 아이에게 제 목도리를 벗어 둘러주며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부모님을 잃어버린 거니?”
남자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뚫어져라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맑고 투명한 푸른 눈은 빨려 들어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계속되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 유리는 서둘러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유리의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어서야 남자아이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자아이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조그맣고 빨간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카츠키…유리”
아이는 제 목에 감긴 목도리를 만지작댔다. 아이는 자신을 불러대고 있는 중년남성을 향해 천천히 발을 내딛어 가며 한 사람의 이름을 되뇌었다. 이상하리만큼 느긋한 태도였다. 아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그의 두 발자국만이 새하얀 눈의 표면에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
카츠키 유리, 그는 29세의 피겨스케이팅 선수이다. 시니어 데뷔 1년 후부터 세계신기록을 몇 번이나 갈아치우며 피겨계의 전설로서 남았다. 그가 유독 인기가 많은 이유는 연기를 시작하기 전과 후의 갭의 영향이 크다. 링크장에 오르기 전에는 벌벌 떨며 줄곧 긴장을 해대지만 연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페로몬을 내뿜으며 사람들을 매혹시켜버린다. 그의 어깨까지 오는 칠흑 같은 머리칼은 점프를 할 때 아름답게 휘날린다. 선수로서는 꽤 많은 나이임에도 다른 선수들에 비해 좋은 연기를 펼치고 있다. 그런 카츠키 유리는 지금 러시아에서 열리는 예선 싱글을 치르기 위해 호텔에서 묵고 있다. 유리는 밤 늦게 도착했기 때문인지 시차 때문인지 졸린듯한 표정으로 눈을 비비며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멍하니 식당이 있는 로비를 향하던 유리는 도중에 층이 멈추자 멀뚱거리며 열린 문 앞에 놓인 상대를 가만히 응시했다. 상대는 차가운 눈초리로 유리를 흘끗 쳐다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유리의 옆에 섰다. 그는 두 손을 제 주머니에 찔러놓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그의 푸른 눈과 은발은 엘리베이터 조명의 아래에서도 반짝였다. 유리는 이 남자를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는 어째서인지 이 느낌이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게 되는지 의문을 품으며 골똘히 생각했다. 그렇게 이어진 침묵은 유리의 탄성소리로 깨어지게 되었다.
“아! 그쪽 빅토르 맞죠. 아, 제가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번에 일본 대회에서 1위를 했던 그…”
유리는 자신이 초면인 사람에게 큰 소리를 내게 된 것이 부끄러웠는지 뒤로 갈수록 말을 흐리더니 아예 말을 끝맺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뒤엉키며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조용히 어두운 오오라를 내뿜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아…역시 나는 최악이다. 초면인 사람한테 이렇게 다짜고짜 이름을 부르며 소리치다니. 역시 민폐였을까? 정말 내가 이런 짓을 하다니. 내가 미쳤다고 이런 행동을 해서… 아아 그냥 나는 죽어야지 왜 살까 사회의 쓰레기…”
유리는 온갖 부정적인 말들을 내뱉으며 실소를 내뱉었다. 그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은 채 실성한 사람처럼 굴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했음에도 내리지 않는 유리를 빅토르는 손을 붙잡고 끌고 나갔다. 유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빅토르가 가는 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빅토르씨 어딜 가시는 건가요?”
“유리씨 아직 저녁 안 먹었다고 했죠? 제가 이 근처에 맛있는 곳을 알거든요.”
그렇게 그 둘은 러시아의 밤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큰 길을 지나 달빛도 겨우 새어 들어올 듯 한 골목길을 쭉 따라가 보니 그곳에는 온화한 분위기의 가게가 하나 있었다. 가게 창문의 밑에는 화분들이 나란히 놓여있었고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가게는 언뜻 보면 양식음식점으로 보였었다. 딱 보기에도 서양풍의 장식들이 가게 앞에 놓여져 있었으니 말이다. 유리는 양식을 못 먹지는 않지만 일식을 선호하는지라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빅토르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음식점 내부는 그의 상상과는 조금 달랐다. L자형의 바 뒤로는 분주히 요리를 하는 사람이 보였고 라멘의 냄새가 풍겨왔다. 빅토르는 그 바에 앉고는 그 옆의 의자를 뒤로 빼내며 앉을 것을 권했다. 그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러시아어로 몇 마디 말하고는 두 턱을 괴었다.
“여긴…?”
“아 여긴 내가 자주 오는 곳이에요. 일식이 주라서 유리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메뉴판은 어디에 있나요? 일단 뭐라도 시키죠.”
“이미 시켰는데?”
“네?”
“카츠동, 유리가 좋아하는 음식이죠?”
빅토르는 당황하는 유리의 앞에서 태연하게 말했다. 유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아주 예전, 자신의 데뷔직후 인터뷰에서 말한 것이 다이고 그 인터뷰는 잡지의 귀퉁이에 아주 작게 실려있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유리는 애써 자신의 그 놀람을 감추고 빅토르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리의 빅토르에 대한 인식은 바뀌어갔다. 그에 대한 첫 인상은 그저 ‘아름답게 연기하는 사람’ 이었지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빅토르 니키포로프. 올해 시니어데뷔를 한 러시아 국가대표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유리를 동경하고 있었고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하게 된 계기 또한 유리라고 했다. 유리에게 이것저것 말하는 빅토르의 모습은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와도 같았다. 그는 끊임없이 유리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을 말하고 알고 싶은 것을 물어댔다. 유리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유리조차 몰랐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이렇게나 좋아해주는 빅토르를, 어느 샌가 유리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둘은 그들의 대화에 흠뻑 빠져 식사가 나온 후에도, 식사가 끝난 후에도, 가게를 나와 호텔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대화를 나누었다.
*
몇 일 후, 드디어 러시아에서의 시합날이 밝았다. 유리의 순서는 5번째, 빅토르는 6번째였다. 유리가 연기를 막 끝낸 후 결과를 들은 후 빅토르의 연기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대기실로 가지 않고 날에 가드독을 끼운 뒤 서있었다. 얼마 안 있어, 빅토르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곡명은 사랑에 대하여 에로스, 탱고풍의 음악이 들려왔다. 그의 팔이 허공을 휘저으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 후에 잠시 스텝을 멈춘 뒤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다. 그때 지어 보이는,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그의 미소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 듯 그를 응시했다. 그 후에 이어진 화려한 스텝 시퀀스, 관능적인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관중들을 그저 바라보게 만들었다. 지금 이 장소에는 빅토르가 연기하는 노래만이 들려왔다. 카멜스핀, 그리고 싯스핀. 그후의 이글에서 이어지는 트리플 악셀. 4회전 살코 스텝, 이너바우너, 마지막 점프는 콤비네이션으로 4회전 토루프, 3회전 토루프. 카멜스핀에서 싯스핀. 꽤나 난이도가 있는 안무구성이지만 빅토르는 단 한번의 미스도 없이 연기했다. 이 장소의 모두가 그저 넋을 놓고바라보던 순간,그의 연기가 절정에 달하며 음악이 끝나 적막만이 흘렀다. 그의 연기에 심취해 뒤늦게야 터져나온 박수는 이 장소를 다 메울 만큼 크게 울려 퍼졌다. 빅토르는 숨을 헐떡이며 한곳을 강하게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도착한 곳은 어느곳도 아닌 유리 자신이었다. 그의 에메랄드 빛이 섞인 맑고 투명한 푸른 눈은 제 눈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기억났다. 유리는 마음속에서 중얼거렸다. 이 눈을, 자신은 아주 전에 본적이 있었다. 그건 바로…
fin


